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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집안일은 혼자 버틸 수 없다 2편 |아내에게 쓰는 사과의 편지

늦은 밤 조명이 켜진 주방에서 설거지 앞에 선 여성이 머리를 짚고 쉬고 있다. 반복되는 집안일과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 속에서 누적된 고립과 침묵을 상징하는 유화 스타일 그림.

20일간의 고립 속에서 비로소 들린 아내의 침묵.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는 늦은 이해와 사과의 기록.


📌 시리즈 

《집안일은 혼자 버틸 수 없다 – 고립된 가족에서 작은 부족으로》 시리즈는
1편에서 “왜 현대의 가정은 혼자 버틸 수 없도록 설계되었는가”를 다뤘습니다.
 
이번 2편은 그 구조가 실제로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 체험 속에서 드러난 고립의 진실을 기록한 고백입니다.
 
3편에서는 이 문제가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고립 시스템’임을 밝히고
함께 살아남는 새로운 방식의 지도를 제시합니다.


🔗 

20일 넘게 집안을 혼자 지키는 동안,
나는 단순한 ‘힘듦’을 넘어
설명할 수 없는 고립의 통증과 마주했다.
 
그 순간 비로소,
아내가 얼마나 오래 이 침묵 속을 걸어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   집안일을 20일 넘게 혼자 해보며 비로소 들린 외로움의 목소리


1. 혼자가 되어보니 비로소 보인 것들

사람은 고립을 견디며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때 ‘개인의 소명’과 ‘책임감’을 말하며
홀로 버티는 삶을 미덕처럼 여겼다.
 
그래서 집안이라는 생활 현장도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
“각자의 역할만 하면 된다”라고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우고
그 모든 일을 내가 혼자 감당해 보자
그 생각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 다음 끼니를 준비하는 이 반복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라
삶 전체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노동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독했다.
 
어떤 철학도, 어떤 사명감도
이 뒤틀린 고립 구조를 견딜 힘을 주지 못했다.
 
2주가 지나자
육체적 피로보다
정서적 침묵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아내는 이 외로움 속에서
얼마나 오래 버텨왔던가.
그리고 나는 그걸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던가.


2. “가장 가까운 사람을, 나는 외롭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집을 지키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일터에서 버티는 나의 방식,
책임감을 강조하는 태도,
“가끔 도와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헛된 자신감.
 
그러나 이번 경험은
그 모든 착각을 드러냈다.
 
나는 집안일의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고립의 구조’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는
그 고립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견뎌왔다.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은 나는
깊은 부끄러움과 후회를 느꼈다.


3. 잘못된 비전을 말하며, 나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는 종종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우리 가정의 방향성을 만들자.”
 
그 말들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비전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었다.
 
지금의 일상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희미한 미래를 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압박이었다.
 
나는 몰랐다.
그 말이 아내에게 얼마나 멀게 들렸는지,
얼마나 버거웠는지.
 
이제야 이해한다.
그동안의 나는
‘함께 꾸는 꿈’을 말한 것이 아니라
아내 혼자 감당해야 했던
무한한 희생을
꿈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4. 그래서 이 글은, 아내에게 드리는 사과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 묻는다.
 
“나는 그동안
아내를 외로움 속에 방치하지 않았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내가 가장 늦게 이해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답은 선명하다.
그렇다.
나는 아내를 외롭게 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며,
아내에게 드리는
진심 어린 사과문이다.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텨왔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달은 이상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5. 공동체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 다음 이야기를 향해

1편에서 나는
“왜 현대의 가정은 혼자 버틸 수 없도록 설계되었는가”를 묻고,
2편에서는
그 구조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고립되고 무너지는지를 기록했다.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아직 정답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공동체는 기다린다고 생기지 않는다.
이해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회복되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다시 설계하지 않으면,
고립은 언제든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다음 글에서는
함께 버티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방향의 지도로서 하나씩 짚어보려 한다.
 


📚 미주 · 참고문헌

  • Arlie Russell Hochschild, The Second Shift: Working Families and the Revolution at Home, Penguin Books, 2012.
  • OECD Family Database, “Distribution of household tasks between partners”, 2023.
  • UN Women, Progress of the World’s Women: Families in a Changing World, 2019.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가사·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 재조명 연구」, 2022.
  • 김정란, 「가정 내 돌봄노동과 심리적 고립의 상관성」, 『한국가정관리학회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