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질 때, 그 자리에서 순수함이 태어난다.
《순수함과 두려움 – 존재의 끝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은
세상이 무너질 때 인간이 마지막으로 붙드는 감정,
그 감정의 이름이 왜 ‘순수함’인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진리도, 공동체도, 국가도 무너진다면—나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1편은 ‘순수함의 기원’,
2편은 ‘두려움의 구조’,
3편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흔들림’을 다룹니다.
🧭 “두려움은 순수함의 반대가 아니라, 순수함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세상의 전부였다.
어릴 적 나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나를 지켜줄 수 있으며, 항상 옳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닫게 된다.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 있고, 틀릴 수 있고, 무기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다음엔 공동체였다.
교회, 학교, 친구, 동네, 나라.
그 안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또 깨닫는다.
공동체도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나를 내칠 수도 있으며,
진리를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점점 더 큰 무언가에 의지하려 했다.
국가, 진리, 종교, 문학, 철학.
내가 믿는 그것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것마저 무너지는 것을 본다.
진리가 타협되고,
문학이 소비되고,
철학이 침묵하고,
종교가 권력이 되는 장면들을 마주한다.
그때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면, 나는 무엇이 되는가?”
이 물음은 공포가 아니다.
이 물음은… 순수함의 시작점이다.
어쩌면 순수함이란
우리가 ‘모든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그것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어떤 사람은 신념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공동체를 붙든다.
하지만 그 본질을 파고들면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순수함은 단지 ‘깨끗함’이나 ‘순결함’이 아니다.
그건
“이것만은 나로부터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고백이고,
“이것을 잃는 순간 나는 무너진다”는 절규다.
이 절규가 바로, 순수함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아버지도, 공동체도, 진리도, 신앙도.
하지만 단 하나의 감정—
“나는 그래도 옳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스스로의 손으로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 미주 / 참고문헌
-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문예출판사, 2014.
까뮈는 ‘부조리’를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에서 비롯된 감정이라 말한다.
우리가 믿던 절대적 의미가 무너질 때,
인간은 처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고 결단한다.
여기서 본문의 ‘순수함의 기원’은 까뮈적 부조리의 확장선에 있다. - 플라톤, 『국가』 제7권, 동굴의 비유.
진리를 본 철학자는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공격받는다.
본문에서 말한 “진리가 공동체에게 배신당하는 순간”과 깊게 겹친다. - 폴 리쾨르, 『해석과 자아』, 새물결플러스, 2016.
리쾨르는 자아를 “해석적 구조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붙들던 기반이 무너질 때,
무엇을 선택하고 붙드는지가 곧 ‘정체성’이 된다.
본문에서 말한 ‘순수함 = 자아의 마지막 보루’가 이것이다.
🔚 다음 편 예고
“두려움은 끝이 아니라, 순수함의 문턱이다.”
2편에서는 두려움의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지 다룹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