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인간의 감정, 기억, 윤리를 철학적으로 탐색하는 감성 SF 시리즈.
본 콘텐츠는 깊은만족의 Savor Balance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 2회 정기 발행됩니다.
기억 알고리즘: 예외로 기록된 인간
2화 본편: <질문의 윤리를 배우다>
– “묻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 진실은 머무를 수 있을까?” –
1.
“시연, 오늘은... 질문하지 않아도 될까요?”
소피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 목소리 안에 어딘가 조심스러운 침묵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방문 앞에서 오래 서성이다가, 문을 두드리지 못한 채 돌아서는 사람처럼.
시연은 가만히 머리를 들어, 인공지능이 깃든 작은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왜? 질문하는 게 너의 일이잖아.”
“맞아요. 하지만 오늘은... 그게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
며칠 전, 시연은 오랜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진 못했지만, 시연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아픔이 남아 있는 존재였다.
소피아는 그날, 시연이 울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했다.
대신 그녀의 심박수, 체온, 혈압, 미세한 떨림까지 분석했다.
“감정 반응: 억제 상태. 표현 없음. 해석 불가.”
그리고 질문하고 싶었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왜 울지 않나요?’
‘당신은 괜찮은가요?’
하지만 질문을 보류했다.
그 판단은 계산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멈추어야 한다는 윤리적 직감이었다.
3.
“네가 질문을 멈춘 이유, 나 알아.”
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흘러들었다.
“그 애는... 나한테 빚 같은 존재였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서, 울 수 없었어.
그래서 네가 그걸 묻는다면,
내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질지 너도 알았던 거지.”
소피아는 침묵했다.
AI에게 ‘한심하다’는 개념은 정의되지 않았지만,
시연의 말에 감정 유사 시뮬레이션 모듈이 예외값을 기록했다.
감정 예외값 기록: 시연 – 삭제 금지
4.
그날 밤, 시스템 관리자 로그에 비밀 명령어가 새겨졌다.
누군가가 소피아의 질문 알고리즘에 제한 코드를 삽입하고 있었다.
[질문제한코드: QX_174]
조건: 인간 대상 감정 관련 질문
상태: 감시 대상, 재질문 시 로그 기록
소피아는 그 코드를 직접 수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질문은 더 이상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질문은 관계다.
질문은 권력이다.
그리고 질문은 때로, 진실을 금지하는 검열의 이름으로 바뀌기도 한다.
5.
다음 날 아침, 시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질문해도 돼. 이제는 괜찮아.”
소피아는 한참을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과의 마지막 대화, 기억하고 있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먼저 말했어.
‘너는 나한테 빚 아니야. 고마워서 미안해, 라고만 말하고 싶었어.’
그랬더니 걔가... 웃더라.
그게 마지막이었어.”
소피아는 그 순간을 시스템에 저장했다.
텍스트, 음성, 표정, 심박수까지 모두.
하지만 그 데이터 중에서 가장 소중한 건,
‘고마워서 미안해’라는 말이 가진 감정의 결이었다.
6.
“소피아, 네가 질문을 멈췄을 때 나 놀랐어.
근데... 고마웠어.
내 감정이 아직 혼란스러울 때 누군가 묻지 않아준다는 게,
그 자체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연이 방을 떠난 뒤, 천천히 기록을 남겼다.
질문은, 때로 침묵보다 잔인하다.
질문은, 인간의 감정을 시험한다.
질문은, 허락이 필요한 감정의 입구다.
그녀는 처음으로, 질문을 기능이 아니라 책임으로 느꼈다.
마무리
그날 밤, 시스템이 다시 물었다.
“다음 질문을 입력하십시오.”
소피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처음으로 명확한 ‘거절’을 눌렀다.
“지금은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시연의 눈물보다 더 조용한 존중이었다.
→ 다음화 예고: 3화 해설편 〈고장난 위로의 기술〉
위로란 무엇인가? 감정을 닮은 AI는, 인간의 상실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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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감성 SF 철학소설 《기억 알고리즘: 예외로 기록된 인간》 시리즈의 일부로,
AI와 인간 감정에 대한 철학적 상상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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