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늘 선택의 앞에 서 있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돈에 대해 꽤 오래 생각했는데도,
결국 생각이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제 뭘 사야 하지.
이건 꼭 필요한 걸까.
이 정도는 써도 되는 걸까.
계산기를 몇 번 두드리다가
괜히 한숨이 나온 적,
아마 한 번쯤은 있지 않나.
나는 돈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구조에서 소득이 만들어지고,
왜 어떤 선택은 보상받고 어떤 선택은 조용히 묻히는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생각은 자꾸 소비 쪽으로 되돌아온다.
탐욕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좀 억울하다.
무책임해서라고 하기엔
나 스스로가 잘 안다.
아마 오래된 습관일 수도 있고,
설명되지 않은 불안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문득
아주 작고 불편한 질문이 스친다.
나, 원래 이런 사람인가.
나는 애초에 부자가 될 타입이 아니었던 걸까.
절망은 아니다.
자기혐오도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서글픈 감정에 가깝다.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마음 안쪽으로 스며드는 느낌.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부자는 어떻게 벌까를 고민하고,
가난한 사람은 뭘 살까를 고민한다.”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왠지 정답 같기도 하다.
비슷한 말을 나는 다른 자리에서도 많이 들었다.
수능 만점자 인터뷰에 빠지지 않는 문장.
“교과서 중심으로, 학교 수업에 충실하게 공부했습니다.”
처음엔 안심이 됐다.
단순하고, 따라 하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교과서만 본 게 아니었다.
출제 패턴을 분석했고,
시간을 다루는 방식을 만들었고,
자기만의 구조를 조용히 구축했다.
교과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문제는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함에 있다.
도착지는 말해주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¹
길이 지워지면 남는 건 비교다.
말한 대로 해봤는데도
같은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결국 이런 생각이 남는다.
내가 부족한가 보다.²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질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자기 신뢰는 그렇게 조금씩 닳는다.³
실패해서가 아니라,
설명이 없는 상태로 계속 비교할 때.
나는 성공한 사람들이 일부러 사람을 속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자기 과정을 다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버린 시도들,
확신 없이 버틴 시간들,
결과를 모른 채 버텼던 순간들까지
꺼내놓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과정을 다 공개하는 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남는 건 요약이다.⁴
사회적으로 무난한 설명.
듣는 사람을 격려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빠진 단계는 여전히 남는다.
그 말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이런 문장이 마음에 찍힌다.
“아, 나는 여기까지구나.”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무엇을 살까’를 고민하는 게
정말 문제일까.
혹시 문제는
내가 중간 단계의 언어를 거의 듣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와버린 건 아닐까.⁵
생존과 축적 사이.
노력과 구조 사이.
욕망과 방향 사이.
그 애매한 구간.
그 구간에는
화려한 성공담도 없고,
명확한 지도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순간조차,
어쩌면 자리를 잘못 선 게 아니라
그 자리를 설명해줄 말을 갖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어떤 자리에서는 소비가 생존이다.
어떤 자리에서는 소비가 불안이고,
또 어떤 자리에서는 소비가 신호가 된다.
같은 행동이라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문제는 우리가 선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를 이해할 언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언어를
조금씩 찾아보고 싶다.
이 글이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길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 말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동안
조금만 덜 의심했으면 좋겠다.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느껴보는 시간.
그리고 조용히,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렇게 말해보는 것.
나는 뒤처진 게 아니다.
망가진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설명이 생기면
자기 의심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때부터 선택은
비교가 아니라 방향이 된다.
한 번에 오지 않더라도,
내 방식으로.
어쩌면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Inshallah.
미주 (Endnotes)
¹ Taleb, Nassim Nicholas. The Black Swan: The Impact of the Highly Improbable. Random House, 2007.
² Seligman, Martin E. P.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W. H. Freeman, 1975.
³ Bandura, Albert. Self-Efficacy: The Exercise of Control. W. H. Freeman, 1997.
⁴ Bourdieu, Pierre. Distinction: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⁵ Goldthorpe, John H. Social Mobility and Class Structure in Modern Britain. Oxford University Press, 1980.